I 정면을 응시하지 못하던 아이가 그리는 나만의 작은 숲

“왜 풍경을 그리시나요? 왜 사람은 없나요? 왜 형태 밖으로 나오는 선들을 사용하시나요?”
제 작업을 마주하는 분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저는 조금 개인적이고 오래된 저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합니다.
저에게는 선천성 안진(眼振)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원인이 시신경을 불안하게 하여 눈동자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증상입니다. 제 시야에는 흔들리는 시점과 흔들리지 않는 주 시점이 늘 동시에 존재합니다. 주 시점이 정면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저는 참 많은 놀림과 지적을 견뎌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저는 늘 이방인이었고, 정답이 아닌 방향을 보고 있는 아이였습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며 저는 자연스럽게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 상황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곳, 바로 풍경 속이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저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같은 풍경이라도 제 눈의 움직임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멈춰있는 듯 움직이는 세상’. 그 묘한 이질감과 생동감이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제 그림 속에서 형태를 빠져나오는 자유로운 선들은 제 눈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정직한 기록입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포착한 찰나의 잔상들을 연필 끝에 실어 캔버스 위로 옮깁니다. 색이 없고 명도만 존재하는 연필 작업은 저에게 깊은 몰입을 선물합니다. 잉크처럼 단호하지 않고, 제 손의 미세한 움직임과 떨림까지 섬세하게 받아주는 연필과의 만남은 드로잉의 즐거움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필압을 세심하게 조절하며 선을 쌓아 올리는 과정은, 불안했던 제 마음을 다독이는 수행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 풍경에 사람이 없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온전히 자연과 나만이 존재하는 평화로운 침묵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관찰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제가 찾은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 상황’을 보는 분들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타인의 시선에 지쳐 숨을 곳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제 그림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숲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붓 대신 연필을 듭니다.
흔들림은 저에게 결핍이 아닌, 세상을 보는 특별한 창이 되었습니다. 형태를 벗어난 불완전한 선들이 모여 울창한 나무를 이루듯, 우리의 조금은 흔들리고 어긋난 삶도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정면을 응시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조금 흔들려도 괜찮습니다. 제 흑백의 풍경 속에서 여러분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평온한 순간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배영미 (사)한국색연필화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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